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는 인간의 도덕성과 예술적 감수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관객에게 섬세한 질문을 던집니다. 치매를 앓기 시작한 한 노년의 여성이 손자의 범죄 사실과 마주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죄책감과 감정, 그리고 ‘말하지 않음’ 속에 숨겨진 윤리의 무게를 말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시의 핵심 줄거리, 시적 상징들, 그리고 주인공 양미자의 인물해석을 중심으로 작품을 깊이 있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줄거리 – 평범한 일상 속, 윤리의 균열
시는 중소도시에 사는 60대 여성 양미자(윤정희 분)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최근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는 등의 증상을 보이며 병원을 찾고, 초기 치매 진단을 받습니다. 동시에, 손자 종욱이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했고 그 피해 학생은 자살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학교, 학부모, 경찰은 조용히 합의금을 통해 사건을 덮으려 하며, 미자 역시 그 논의에 끌려 들어갑니다. 하지만 미자는 손자의 범죄에 대해 도무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녀는 손자를 직접 꾸짖지도 못하고, 합의금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와중에 미자는 지역 문화센터의 ‘시 쓰기 수업’에 등록해,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해 보려 애씁니다. 그 시도는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닌, 삶의 고통과 기억을 마주하는 여정이 됩니다. 영화는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닌, 침묵과 관찰, 감정의 세밀한 파동에 집중합니다. 미자는 점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내면적으로 고민하며,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용한 결단을 내립니다. 영화의 결말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관객은 미자의 선택을 시(詩) 한 편과 카메라의 부재를 통해 직감할 수 있게 됩니다.
상징 – 시, 꽃, 침묵, 그리고 윤리적 감각
시는 제목 그대로 영화 전반에 걸쳐 시적 상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첫 장면, 강물 위를 떠다니는 소녀의 시신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장면까지, ‘죽음’과 ‘기억’, ‘말할 수 없음’은 중요한 주제를 이룹니다.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시’입니다. 미자는 시 쓰기를 통해 치매로 흐릿해지는 기억과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시는 예술이자 고백이며, 감정의 순화 장치로 기능합니다. 단순히 예쁘고 감성적인 글이 아니라, 삶을 응시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마주함’의 행위로 그려집니다. ‘꽃’도 중요한 상징입니다.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꽃’을 관찰하고 느끼려 노력하지만, 정작 그녀가 마주해야 할 것은 손자의 범죄로 상징되는 ‘추악한 현실’입니다. 꽃과 강, 소녀의 사진 등은 모두 생명과 상처를 동시에 상징하는 시적 이미지로 사용되며, 영화의 정서적 긴장을 이끕니다. ‘침묵’은 가장 무거운 상징 중 하나입니다. 어른들은 사건을 덮으려 하고, 미자는 꾸짖지 못하고, 종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침묵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윤리의 부재, 또는 책임의 유예입니다. 침묵 속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피해자는 더욱 외면당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적 침묵에 대해 묵직한 비판을 가합니다. 결국 영화의 모든 상징은 인간의 도덕성과 무관심, 그리고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시는 ‘무엇이 윤리적인 행동인가’를 말없이 묻고 있는 작품입니다.
인물해석 – 양미자라는 존재의 윤리와 고백
양미자는 영화 시의 중심이며, 그녀의 감정선과 선택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갑니다. 그녀는 전형적인 노년 여성처럼 보이지만, 속내에는 갈등과 고통, 외로움이 가득합니다. 손자의 범죄 앞에서 그녀는 단순한 가해자의 보호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미자는 책임감과 무력감 사이를 오가며, 사회가 요구하는 ‘조용히 넘어가라’는 메시지에 쉽게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손자를 사랑하면서도,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과 공감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이는 윤정희의 절제된 연기를 통해 감정적으로 폭발하지 않지만, 깊은 내면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미자의 인물은 이창동 감독 특유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녀는 스스로 진실을 직면하고, 침묵을 거부하며,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이는 곧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또한 미자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시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습니다. 결국 그녀의 선택은 죄를 대신 갚는 희생이자, 윤리에 대한 조용한 저항입니다.
영화 시는 고요하지만 강렬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줄거리의 간결함 속에서도 무거운 감정선과 상징이 관객의 마음을 깊게 흔들며, 윤정희의 내면 연기와 이창동 감독의 연출이 결합되어 철학적 여운을 남깁니다. 삶과 죽음, 죄책감, 예술,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성찰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단순한 감상 이상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 시대에 꼭 다시 봐야 할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