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충무로의 새로운 감각을 증명한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저예산 독립영화로 시작해 한국 누아르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 영화는 단편 네 편을 엮은 옴니버스 구성으로 서울 하층민의 현실, 폭력, 분노, 형제애, 복수의 욕망 등을 다룬다. 류승완과 그의 동생 류승범이 직접 연기한 이 작품은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불안한 공기와 젊은 세대의 분노를 영화적으로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줄거리, 인물 분석,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심층 해석한다.
1. 줄거리 요약 – 네 개의 단편이 그리는 폭력의 순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총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갖고 있으며, 도시 하층민들의 삶과 폭력을 통해 일관된 정서를 전달한다. 첫 번째 단편 Rites of Passage는 교복 입은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부모도 없고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한 채 거리에서 폭력을 일삼는다. 삶의 방향도, 이유도 없이 그저 분노로 하루를 버티는 소년의 모습은 불안정한 청춘 그 자체다. 두 번째 이야기 Suddenly, One Day에서는 주인공이 여동생을 건드린 조직원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복수는 계획대로 되지 않고, 그는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전락한다. 이 이야기는 개인의 분노가 사회적 정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폭력만을 낳는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세 번째 이야기 Die Bad에서는 주인공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갔다가 출소 후 다시 사회에 복귀하지만, 그는 이미 낙인이 찍힌 존재로서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점점 파멸로 향한다. 그의 인생은 다시 폭력의 굴레로 빠져든다. 마지막 에피소드 Die Bad: Conclusion은 전작들의 주인공들이 교차하는 구조로, 과거의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며 종결된다. 영화는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으며, 결국 폭력과 분노는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4개의 단편은 각기 다른 인물을 보여주면서도 공통된 정서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2. 인물 분석 – 현실에 부딪힌 청춘들의 분노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인물들이다. 그들은 학교, 가족, 조직, 국가 등 어떤 구조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며, 결국 생존을 위해 폭력에 의존한다.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류승범이 연기한 고등학생 캐릭터다. 그는 보호자도, 목적도 없이 거리에서 헤매며 싸움을 벌이고, 결국은 사소한 이유로 치명적인 폭력을 저지른다. 그러나 이 인물은 단지 폭력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미성숙함, 보호받지 못한 환경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세상이 그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허탈감 속에서 폭력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인물이다. 류승완이 연기한 인물은 복수심에 불타는 남성이다. 그는 여동생의 사건 이후 법이나 사회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정의를 집행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폭력의 일부가 된다. 이 캐릭터는 정의와 폭력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상징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소외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들은 제대로 된 직업도, 관계도 없이 그저 거리와 조직, 혹은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영화는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이해하게 만든다. 그들은 악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3. 사회 배경 – 90년대 말 한국, 폭력의 구조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주는 불편함은 이 영화가 단지 폭력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폭력이 어디서 왔는지, 왜 반복되는지를 끈질기게 묻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리는 1990년대 말의 한국은 경제적 불안, 청년 실업, 교육 실패, 가족 해체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회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젊은 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 갇혔다. 대학 졸업장을 얻어도 일자리는 없고, 고등학생은 공부가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삶’은 갈수록 좁아지고, 폭력은 하나의 대체 수단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그런 현실을 과장 없이 보여준다. 화려한 액션 장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이 겪는 소외감과 단절이다. 또한 경찰, 조직, 학교, 가정 등 그 어느 구조도 이들을 품지 않는다. 결국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이들에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구조적 비극을 고발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단순한 폭력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초상을 담은 사회 보고서이며, 동시에 젊은이들의 분노와 절망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다. 류승완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형 누아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동생 류승범과 함께 강렬한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이 영화는 저예산과 비전문 배우로도 얼마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를 죽게 만들었고, 또 누구를 나쁘게 만들었는가?”